※브금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몰입을 원하시는 분들은 재생 한 채 즐겨주세요.
천둥이 치고 비가 오면 내 마음은 빗물과 함께 하수구로 빠져들어갔다.
내 두 눈을 감고 어둠을 순응하면 멈춰버린 내 시간을 응시하게 된다.
24살의 봄.
졸업을 앞둔 내 앞에 무슨 악몽이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나는 하나의 제안을 받았다.
너는 내가 가르친 학생중에서 제일 훌륭한 학생이야.
경찰학교 총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 달콤한 말에 이끌려 후에 나온 조건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아. 너도 내가 가르친 학생들 처럼 위험에 처하겠지.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넌 과연 이 나라의 최고라 할 수 있을 거다.
어때 완벽해지고 싶지 않나.
내밀어진 서류에는 이미 아버지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아래에 사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인과 함께 내 몸이 허공에 일그러진다.
나는 잉크처럼 옅어져 어디론가 흘러갔다.
검은 흙탕물이 자동차 바퀴에 튀어 흩어졌다.
내가 도착한 곳은 회색빛의 항구였다.
컨테이너가 가득한 그곳에서 나던 녹슨 냄새와 바다향기가 생생했다.
마치 피 냄새같이 진득하게 머리카락에 스며들던 향기.
내 제복은 그 향기를 머금어 차갑게 식어갔다.
그곳에 내려진 나를 두고 검은벤은 멀리 떠나갔다.
기다리는 나에게로 다가온 검은정장의 사나이들은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권총도 수갑 없이 비무장 상태의 나는 검은벤을 따라 온 것 처럼 그들을 따라 어두운 창고로 걸어갔다.
창고에 들어가면 나는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내 앞 뒤로 바짝 붙은 두 남자는 나를 데리고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습습해지는 공기에서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릿한 쇳내가 짙어져갔다.
나는 더듬 거리며 계단을 따라 내려가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백열등 하나로 간신히 사물을 파악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물든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간단한 신체 검사 끝에 내게 작은 컵에 담긴 알약을 건넸다.
이걸 먹으면 어지러울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은 나를 지켜봤다.
긴장감이 흐르고 내 손에 뜨거운 땀이 배어나왔다.
흔들리는 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고인 침과 함께 약을 털어 넣으면 곧 안 가 온 몸의 근육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잉크처럼 흘러내리는 내 주변을 혼란스럽게 둘러보고 내 손을 내려다 보면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녹아내리는 건 주변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뒤척이는 나는 서늘함 속에서 눈을 떴다.
다시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 하고 헐떡이는 숨소리를 배경으로 시야가 닫힌다.
다시 한 번 눈이 번뜩 떠졌다.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추위가 내 머리 끝 부터 발 끝 까지 관통했다.
벌벌 떨리는 내 사지는 실험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릴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어둠보다 더 내 눈을 멀게 만든다.
강렬한 빛 앞에서 로드킬을 기다리는 짐승의 마음이 됐다.
움직여 보려 해도 덜컹거리는 소리만 귓가에 묵직하게 울렸다.
나에게 다가오는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차가운 눈이 왔다갔다 흔들렸다.
살려달라고 했던가? 풀으라고 협박을 했나?
그들은 내 모든 간절함을 비웃고 있었다.
다가오는 서늘한 메스가 내 목을 쓰다듬었다.
메스가 스치는 길을 따라 피가 맺히고 생살을 베는 괴로움에 열린 입에서 나온 비명은 수면 아래에서 외치는 것 마냥 먹먹하게 들렸다.
모든 것이 하얗게 점멸한다.
경적소리와 함께 정신이 멀어진다.
몇 번의 실험을 빙자한 고문으로 내 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 지하에 들어 올리 없는 달빛을 보았다.
헛것인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보면 손에 닿는 것은 차가운 조명 뿐이었다.
천천히 죽음이 나를 압도했다.
내 몸은 천근만근 늘어지고 내 손 끝은 삼도천을 첨벙거린다.
묵직한 숨이 임종을 앞당기고 멀어지는 감각들 사이에서 오직 내 눈물만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미 보이지 않는 시야에 눈을 뜨고 감고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내 머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이미지는 나를 위한 마지막 극장이었다.
나는 찾아온 안식 속에서 나를 위한 극장을 즐겼다.
태어나서 엄마에게 버림받아 아빠의 품에 안겨 러시아를 떠도는 나는 무작정 울어대며 의식주를 갈구했다.
아직 젊은 아빠는 나를 어쩔 줄 몰라하며 달래기 바빴다.
걸음마를 뗄 때 쯤에는 아빠가 다니던 체육관에서 아빠를 따라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아빠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를 끌어 안은 그의 따가운 뺨이 나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중학생이 되어 아버지의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차별에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나에게 아버지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폭력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약자를 때리는 나야말로 차별을 조장하는 인간이라고.
나는 그 때 부터 법을 믿었다. 정의를 믿기로 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떠나 베이커가에 가기로 했던 것이다.
경찰학교 진학률이 높은 테이탄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경찰학교에 진학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주먹을 들어야만 했다.
체육관에 들어가 종합격투기 선수가 되어 돈을 벌면 버는대로 학비에 충당했다.
얻어터진 얼굴로는 미팅도 할 수 없었다.
나라에 기여하려 청춘을 공부에 돈벌이에 바치고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사격에도 최고 공부에도 최고 무술에도 최고 언어에도 최고. 뭐든지 일등을 놓치지 않아야만 혼혈아라는 프레임을 벗겨낼 수가 있었다.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를 반기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꾸며낸 인성까지 더해져 나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런 돋보이는 존재가 될 수록 어둠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나이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른 나이에 타오르듯 빛난 나는 어두운 지하 실험실에 갇혀 Aptx4869라는 약의 실험체가 되어 있었다.
짧은 인생이었고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많은 삶이었다.
아쉬움으로 쓰라려진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심정지음이 극장에 울렸다.
마치 영화의 끝을 암시하듯.
몸을 일으켜 극장을 떠나려고 했을 때 엔딩크레딧 너머로 새하얀 화면이 다시 이어졌다.
멍해진 내 귓가에 다시 심장음이 두근두근 들끓었다.
온 극장을 돌아다니며 이 영화를 끝내려 애썼지만 내 절규와 반대로 다시 영화는 시작 되는 것이었다.
돌아온 내 동공을 바라보는 여러개의 눈들.
그들은 희열과 기쁨에 젖은 괴물들이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극장에 앉은 내 눈에 의미 없이 화면이 스쳐지나갔다.
세뇌시키듯 과거가 흘러들어왔다.
내 절규가 다시 한 번 텅 빈 극장안을 떠돌았다.
하얀 화면 위로 또 다시 눈들이 떠올랐다.
실험대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마치 링 위에 올랐던 때 처럼.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다.
두려워서 손을 뻗는 게 전부이지만 주먹을 휘두른다.
내 몸은 더 이상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휘저어 대던 손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메스 하나가 감겨들었다.
그들이 원했던 마지막 실험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내가 과연 훌륭한 무기일까?
그들이 이 건에 대한 결과를 발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작은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으니까.
하얗기만 했던 화면은 검게 하지만 붉게 물들어 갔다.
검기만 했단 계단 위로 피로 물든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갔다.
나를 따라 이어진 기름길 위로 성냥하나가 떨어졌다.
내 온몸을 적신 땀은 지하실에서 피어오른 불빛에 반짝 거렸다.
빛이 들어오는 바깥으로 기어 올라가면
지옥에서 돌아온 내게 축복의 비가 쏟아졌다.
비구름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달빛이 나의 광기를 밝게 빛냈다.
내 몸이 잉크처럼 녹아 핏물처럼 비웅덩이에 퍼져나갔다.
날 용서하는 듯한 빗줄기가 피에 젖은 나를 씻어냈다.
다시 태어난 나에게로 파도가 몰아쳤다.
화려한 탄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세워진 차문을 열어젖혀 들고 나온 총을 쐈다.
내 필름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죄책감은 죽을 때 지옥에 버리고 온 듯 했다.
시체를 조수석에 밀어넣고 무작정 차를 출발시켰다.
경찰학교 총장의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빗길은 나를 위한 듯 텅 비어 있었다.
다시 한 번 흙탕물이 바퀴에 짓눌려 튀어올랐다.
차에 내린 나의 뒤로 경찰차 소리가 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를 막은 사람들에게 총을 갈겼다.
쓰러진 그들에게 총을 빼앗아 계속해서 총을 쐈다.
건물로 들어가고 난 후로는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았다.
달빛에 비친 거울 속에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에 젖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괴물이 거기 있었다.
몇 번을 총에 맞아 죽어도 다시 일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총장실에 도착해 문고리에 총을 쐈다.
쉽게 열리는 문 앞에서 총장은 무릎을 꿇었다.
나에게 비는 그의 목소리가 인간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전조등 앞에 놓인 짐승처럼 꽥꽥 거리는 그의 입에 총을 물리자 드디어 그 더러운 소리가 멈췄다.
아픈 머리가 가라앉음에 미소가 흘러넘쳤다.
방아쇠는 미끄럽게 나에게로 다가온다.
터지는 폭약음과 함께 내 얼굴로 튀는 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용해진 총장실 안이 나의 엔딩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총장실로 쏟아지는 발걸음들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울린 사운드는 후루야의 목소리였다.
"총을 버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총을 버렸다.
"손을 위로 올리고 천천히 뒤 돌아!"
그의 말 대로 손을 위로 올리고 비틀비틀 그를 바라봤다.
나에게 총을 향한 채 굳어있던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천천히 총을 내렸다.
내 얼굴 위로 유일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날카롭게 흐르는 내 눈물 뿐이었다.
((….죽여주세요…))
"….너….도대체 무슨 짓을…."
그것이 나와 그의 첫 만남의 장이었다.
의미를 잃은 내 필름을 전부 가진 그의 바람대로 나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림요소 포함]노아의 방주_후루야의 꿈 속으로(단편) (0) | 2022.02.23 |
---|---|
[드림요소 포함]노아의 방주_마리아의 꿈 속으로(단편) (0) | 2022.02.23 |
[드림요소 포함] 포기븐_후루야의 경우(하편), 아카이의 경우(상편) (0) | 2022.01.18 |
[드림요소 포함]포기븐_후루야의 경우 (중편) (0) | 2020.09.29 |